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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산들애 | 2023.04.16 14:16 | 조회 32




    “사당에 휘황하게 일곱 신위 올렸으니…”


    팔공산의 솜대는 천년 사이에/ 열렬한 기운을 타고 전후 현자가 생겼으니/ 순절한 곳에 죽음은 오히려 영광이요/ 천륜을 붙잡을 때 살아서 죽지 아니하였네./ 높은 이름 이미 서산에 올라 드러났고/ 꽃다운 행적 일제히 북두에 걸려 우러르네./ 사당에 휘황하게 일곱 신위 올렸으니/ 봄가을 향사를 오래토록 전하리라.[公山綿竹間千年(공산면죽간천년) 烈氣挺生前後賢(열기정생전후현) 死也猶榮殉節地(사야유영순절지) 生而不滅秉彛天(생이불멸병이천) 高名已著西山陟(고명이저서산척) 芳齊瞻北斗懸(방촉제첨북두현) 祠屋煌 七位(사옥위황제칠위) 春秋芬苾後來傳(춘추분필후래전)]


    동래정씨 문중의 일원인 정현(鄭絢)이라는 이의 작품이다.
    칠현은 문화유씨 문중의 일곱 분 충신을 가리킨다. 다음은 이들에 대한 간략한 행적이다. 참고로 유씨 문중에서는 劉[베풀 류(유)]·兪(점점 유) 씨와 구별하기 위해 원래 음가(音價)인 ‘류’로 표기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두음법칙을 좇아 ‘유’로 표기키로 한다.
     
    첫째, 유자미(柳自湄)의 자는 원지(元之), 호는 서산(서산)이다. 1451년(문종 1) 증광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감찰(監察)을 지냈다. 1455년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선수(禪受: 왕위를 물려받음)하자 상왕에 대한 절의를 지켜 공문(空門: 불교)으로 들어가 일생을 은거하였다. 1456년(세조 2)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그 중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의 딸을 데려다 숨겨 길러 며느리로 삼았다.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다. 유작으로 ‘지곡송학도(芝谷松鶴圖)’ 한 점이 전하고 있다. 1493년(성종 24)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조선 초기 화조화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둘째, 유광선(柳光先)에 관한 구체적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많은 후손들이 임란 공신으로 추앙받게 되자 그 공적으로 칠현에 추대된 것으로 보인다.
     
    셋째, 유정(柳汀)은 형조참판 유광선의 차자다. 자는 여원(汝元), 호 송호(松壕).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왜적이 쳐들어오자 경주 심원(深源)에서 독서하던 것을 접고, 4월 18일부터 아들(영춘)과 조카(백춘, 득춘)를 데리고 의병장 윤홍명(尹弘鳴)·이응춘(李應春)·장희춘(蔣希春)과 함께 항전하다가 1597년 9월 61세로 전사하였다.
     
    넷째, 유영춘(柳榮春)의 호는 나암(蘿?)이다. 아버지 유정과 함께 참전, 주로 군수품 조달의 임무를 차질 없이 수행하였고, 아버지가 병이 난 뒤 병사를 거느리고 싸우다 1594년 10월 창암(倉巖)에서 전사하였다.
     
    다섯째, 유백춘(柳伯春)은 유정의 형인 지(沚)의 아들로서 영춘의 4촌 동생이다. 자는 영형(領亨), 호는 제호(霽湖)다. 재질이 영오하여 임란이 일어나기 수년 전에 이를 감지하고 숙부인 유정에게 군량미, 강철, 야공(冶工)을 보내어 병기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등 전쟁에 대비토록 하였고, 임란이 발발하자 마을 장정들을 훈련시켜 앞서 만든 무기로 크게 전공을 세웠다. 1600년 전시에서 얻은 병으로 3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여섯째, 유득춘(柳得春)은 유정의 동생인 호(湖)의 차남이다.
     
    일곱째, 유태영(柳泰英)은 영춘의 아들로서 자는 자실(子實), 호는 지헌(知軒)이다. 영춘이 적의 총탄을 맞아 순국하자 상심한 유정이 전의를 상실하였을 때 태영이 울면서 “대부(大父)께서 출전하지 않으시면 누가 왜적을 제어하오리까. 원컨대 다시 출진하시어 망부의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를 갚아주십시오.”하며 참전할 것을 간곡히 말씀 드림으로써 할아버지로 하여금 다시 칼을 뽑게 하였다.
    이들 가운데 특히 유정·영춘·백춘·태영 4인에 관한 기록은 조선 후기의 학자 윤인석(尹仁錫)의 시문집인 ‘일암집(一庵集)’ 속 문화유씨사의사전(文化柳氏四義士傳)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칠현사는 위의 일곱 문화유씨 가문의 조상을 모셨으며 헌종 을미(1835)에 창건하여 고종 무진(1868)에 철향( 享), 1963년에 복향(復享), 1989년에 중건하였다. 원래 부속 건물로 구복재(龜伏齋)와 경모재(景慕齋) 두 동이 있었으나, 정면 3간 측면 2간 팔작지붕의 재사인 칠현사를 중건하면서 강당인 구복재만 남게 되었다. 원래 산막동 162번지에 있었으나 공단 조성으로 인하여 최근에 상북면 구소석3길 39로 이건하였다./엄원대(동원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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